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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06 드디어 야구 개막을 하였따
  2. 2008.03.17 아주대륙사
크하하하 두산 2연승 아싸 시작이 좋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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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역사

영국의 서아프리카 역사는 홉킨스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1960년의 <아프리카 독립의 해> 이전의 식민지시대 유럽인의 아프리카관(觀)은 아프리카를 자연이나 인간의 낙원으로 보는 <메리 아프리카> 또는 원시적이고 미개하다고 보는 <프리미티브 아프리카>의 두 극단의 <신화>로 채색되어 있었으며 그곳에 사는 아프리카인이 주체가 된 참된 의미의 역사는 쓰여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독립을 달성하고 모든 면에서 아프리카인화가 이루어져 감에 따라 역사연구 분야에서도 종래의 <신화>를 분쇄하고, 유럽인 대신 아프리카인 사가가 주체적으로 역사를 쓰려는 기운이 높아졌다. 그러한 경향이 확대되면서 종래의 유럽인중심 사관의 역사가 서서히 개정되어가고 있다. 아프리카사의 특색으로 두 가지 점이 지적된다.

첫째, 아프리카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무문자사회>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종래의 역사연구가 문자에 의한 사료(史料)를 중시하는 한, 아프리카사 연구는 큰 난점을 지닌다고 할 수 있으나, 문자가 없다는 것을 바로 역사가 없다는 것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며, 실제로 아프리카의 역사는 구전으로 후대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물론 구전이라는 것이 전승과정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왜곡이 뒤따를 수 있는 일이기에 엄정한 전승비판이나 비교연구 또는 언어학·문화인류학 등 역사보조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구전의 바탕이 되어 있는 부족어의 습득은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아프리카인 사가의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

둘째, 아프리카대륙은 결코 고립된 대륙이 아니라 예로부터 여러 다른 민족과 접촉을 통해서 영향을 받아 왔다는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북아프리카 식민, 사하라를 넘는 교역, 동아프리카 해안의 아랍인의 영향, 노예무역과 그 뒤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받은 유럽인의 영향 등을 통해 분명히 볼 수 있다.

물론 유럽인에 의한 식민지화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 불과 70년간이었으며 아프리카사의 흐름 속에서는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다음은 아프리카사를 식민지화 이전, 식민지시대, 독립기의 셋으로 나누어 각 시기를 세분화하여 살펴본 것이다.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

최근 고고학 성과에 의하면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은 매우 유력하게 보인다. 그 근거로서 영국의 고고학자 L.리키박사 부부가 탄자니아 북서부 올드바이계곡에서 발견한 진잔트로푸스 보이세이 화석을 들 수 있다. 이 화석은 약 18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직립보행했고 조제석기(粗製石器)를 사용했던 사람과(科)라 한다.

다시 케냐 북부에서 발굴된 화석은 약 1400만 년이나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화석이 현재의 아프리카인 조상과 직접 관계가 있는지는 현단계에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인류가 계속 살아왔다는 것은 에티오피아나 케냐 그 밖의 여러 곳에서 호모사피엔스 즉 현생인류의 조상 인골이 발견된 사실로 보아 분명하다. 그러나 상세한 경로가 밝혀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인류의 조상이 긴 세월에 걸쳐 혼혈하고 환경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아프리카에서는 다음의 다섯 종족으로 나뉘었다. 즉, 콩고 삼림부에 사는 수렵인 피그미를 가리키는 네그릴형, 현재 남부 아프리카 칼라하리사막에서 수렵생활을 하는 코이산(부시먼)을 가리키는 보스코포이드형, 사하라 이남 농경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니그로이드형, 현재 주로 사하라 이북과 에티오피아에 사는 목축민 코카소이드형, 아시아로부터 마다가스카르로 이주한 뒤 니그로이드형과 혼혈하여 분포된 몽골로이드형 등 다섯 종족이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인은 수렵, 농경, 목축 또는 그 혼합 등으로 여러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고대아프리카 여러 왕국의 흥륭>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흑인왕국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BC 10세기 무렵 이집트 남쪽에서 일어난 쿠시왕국이다. 나일강 중류의 나파타가 수도였던 이 왕국은 고대이집트왕조가 쇠퇴함을 틈타 이집트를 정복하고 제25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BC667년에 아시리아군의 침입을 받아 남방 메로웨로 도읍을 옮기고 메로웨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는 인도양에 이르는 교역 루트와 제철기술로 번성했으며, 독자적인 메로웨문자를 발명했다. 그 문화는 그리스·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큰 구조물을 많이 건설했다. 그러나 기원 전후에 로마군의 침략을 받고 또 AD 350년에는 교역 루트를 장악한 악숨왕국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악숨왕국은 현재의 에티오피아의 전신으로, 아라비아반도와 강한 유대를 가졌고, 인도양 교역으로 번영했다. 6세기에 비잔틴제국과 손을 잡고 페르시아에 대항했으나 오히려 페르시아에게 멸망되었다.

서(西)수단지방에서는 8세기에 가나제국이 번성했는데, 왕가라족의 금(金)과 북쪽의 아랍인이 가지고 온 소금의 교역을 중개하여 경제적 이득을 보았다. 수도는 쿰비살레였으며 아랍인 여행가 알바크리가 11세기 초 궁정의 번영상을 기록하였다. 11세기 후반, 북쪽의 무라비트 왕조가 가나제국의 이슬람 개종(改宗)을 기도하여 남하했는데 1076년에 제국은 멸망했다.

그 뒤 1240년, 만딩고족이 이 지역에 말리제국을 세웠다. 이 제국은 세력을 서방으로 확대하여 왕가라, 밤부크를 포함하여 감비아강에 이르는 일대 제국으로 발전했다. 그 경제적 기초는 사하라를 넘는 교역에 부과한 세수(稅收)였으며, 14세기에는 니제르강 만곡부에 있는 통부크투가 상업·학문의 중심지로서 발전했다.

제3대 만사무사왕은 1324년 여러 종자(從者)와 함께 황금을 가지고 메카를 순례하는 도중에, 카이로에서 황금을 물쓰듯 하여 카이로의 금시세가 10년 이상 동안 떨어졌다고 한다. 왕의 사후, 제국은 차츰 쇠퇴하여 아들 마가왕 시대에는 모시족에게 통부크투를 빼앗겼다.

제5대 술레이만왕은 세력 회복에 힘썼으며, 이 시기에 말리제국을 방문했던 아랍인 역사가 이븐 바투타는 《삼대륙 주유기》에서 그 번영상과 정연했던 국내질서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5세기 초에 북방의 유목민 투아레그족과 남쪽 모시족의 침략을 받고, 1473년 송가이제국에 의해 젠네를 점령당해 말리제국은 멸망했다.

송가이제국의 손니 알리왕은 투아레그족·모시족을 추방하고, 니제르강 상·중류 지역에 일대 제국을 구축했다. 93년에 즉위한 무하마드왕은 광대한 통치조직을 확립하고 과세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재정을 안정시켰다. 또 이슬람교를 보호했기 때문에 사하라를 넘는 교역은 활발해졌으며 젠네, 통부크투, 우알라타 등의 도시는 교역·종교·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16세기 초에는 남쪽의 카치나, 자리아, 카노의 하우사족 등 여러 국가를 멸하여 영토는 대서양 연안까지 이르렀으며 북방에서는 투아레그족의 근거지 에일과 아가데스를 점령했다. 그러나 왕이 죽은 뒤 계속되던 계승자 싸움과 1590년 북방 모로코군의 남하로 송가이제국은 멸망했다.

동아프리카해안에는 7세기에 아라비아반도에서의 이슬람교도 후계자 싸움에서 패한 시아파 사람들이 오만에서 이주해왔다. 아랍인은 이 지역을 잔지라 하여 라무, 말린디, 몸바사, 펨바, 잔지바르, 킬와, 모잠비크, 소팔라 등지에 도시를 건설하고, 인도양 교역으로 번영했다.

아랍인은 잔지의 산물인 금·철·상아·노예 등을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인도로 운반하였고, 인도산의 직물류와 장식구슬, 중국제 도자기를 들여왔다. 해안 제도시의 번영에 관해서는 10세기의 아랍 지리학자 마수디나 12세기의 모로코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기록하고 있다. 이들 동해안의 제도시는 인도양 교역이라는 상업활동을 공통된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외에 이슬람문화와 스와힐리어를 공유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1417∼19년에는 중국 명나라의 정화(鄭和)가 대함대를 이끌고 동아프리카해안에 내항하였다. 그 뒤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동해안에 도래한 이후 포르투갈인이 해안 제도시를 습격하여 공물(貢物)을 강요했으며, 무력으로 도시를 약탈하기도 했다.

이 도시들은 단독으로 또는 연합하여 포르투갈인에 대항했으나, 그 대부분은 패하여 해안부 및 인도양 교역은 포르투갈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상의 고대 아프리카 여러 왕국은 대부분 그 경제적 기반을 <장거리 교역>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경제사학자 C.비드로비치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한 변형으로 <아프리카적 생산양식>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노예무역에서 합법무역으로>

15세기 유럽인의 대항해시대 개막은 종래부터 있어왔던, 북아프리카로부터 사하라사막을 넘는 교역과 인도양을 통한 동아프리카의 아랍인 교역 대신, 그들이 아프리카해안부와 접촉할 기회를 가져왔다. 개막 당시 유럽인의 목적은 동인도와의 향료무역(香料貿易)이었으며, 아프리카해안선은 단순히 원양항해를 위한 보급기지로서의 의미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대륙이 발견되고 그곳의 광산개발과 사탕수수·담배·인디고(염료) 등의 플랜테이션이 진전됨에 따라 노동력으로서의 아프리카인 노예의 가치가 올라가고, 포르투갈·에스파냐를 비롯하여 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의 유럽 여러 나라가 대서양노예무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18세기에는 서인도제도에 대한 노예수출, 서인도제도로부터 유럽으로 열대산물의 수출, 그것을 받아들여 가공한 제품을 아프리카로 운반하여 노예와 교환하는 이른바 삼각무역이 성립하여 노예수출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대서양노예무역의 규모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종래 갖가지 추정(推定)이 시도되어 왔으나, 통설로는 1500만∼2000만 명으로 되어 있었다.

이 통설에 대해 위스콘신대학 역사학 교수 P.커틴은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추정에 의해 종래의 통설을 정정하였다. 먼저, 종래의 통설 형성과정을 밝히고 그 비과학성을 지적했다. 그리고나서 직접적인 증거로서 한계는 있으나 노예수입치(値)를 사용했으며 나아가서 선적기록(노예무역에 관여했던 선박수, 적재량, 항해중의 손실, 즉 발병, 기아, 반항 등에 의한 사망 등)을 사용하였으며, 또한 간접자료로서 인용가능한 인구통계나 서인도제도 및 미국의 생산력 등에 따라 추계를 내서 4세기 반에 걸친 노예무역 규모를 956만 6100명으로 했다.

그 시대별 수출수는 1451∼1600년 27만 4900명, 1601∼1700년 134만 1100명, 1701∼1810년 605만 1700명, 1811∼1870년 189만 8400명으로 최성기는 18세기였다. 수출선(線)은 전기간을 통해 최대가 남아메리카로서 470만 명, 다음이 카리브해제도로서 404만 명, 북·중앙아메리카가 65만 1000명, 유럽이 17만 5000명으로 되어 있으며, 나라별로는 브라질, 아이티, 자메이카, 쿠바 순으로 되어 있다.

또 수출측은, 서아프리카를 보면 세네감비아로부터 곡물해안·상아해안에 이르는 상(上)기니는 노예수출이 비교적 적었으며, 골드코스트로부터 카메룬에 이르는 하(下)기니, 그중에서도 니제르강 하구 주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유럽인이 해안부족에게 무기·화약을 제공하고, 내륙부족에 전쟁을 걸게 하여 그 전쟁포로를 유럽인에게 인도하는 식으로 노예포획이 이루어졌고, 그 거래에는 금·은화가 아니라 갖가지 유럽제품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남녀 두 사람의 노예에 대해서는 연초 한 두름·관상(管狀)산호 한 연·머스킷총 1정·단검 3개·럼주(酒) 3병·린넨 손수건 24장·1파인트들이 용기 12개 등이었고, 특히 총·화약·주류(酒類)·직물류 등이 주요 거래상품이었다.

이 노예무역이 서아프리카 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첫째로 노예사냥전쟁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전사자 및 수출에 의해 아프리카인 인구는 격감했다. 특히 노예로서 수많은 성년층을 잃은 것은 아프리카사회의 생산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둘째로 아프리카인 사회 가운데에도 해안부의 다호메, 오요왕국과 같이 유럽인과 결탁하여 노예사냥에 가담함으로써 발전한 나라가 있었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영국에서 주로 인도적인 이유에서 노예제 및 노예무역을 폐지하라는 소리가 높아졌다. W.윌버포스는 T.클라크슨 등과 함께 1787년 노예무역폐지협회를 설립했으며, 1807년 노예무역은 폐지되었다.

이어서 그들은 1823년 반노예제협회를 창립하고 의회에 출두했으나, 노예제로 이익을 보고 있던 상인이나 플랜테이션 소유자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성과를 못 보고, 1833년에야 가까스로 영국제국 내의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이어서 영국은 다른 유럽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노예무역 및 노예제를 폐지할 것을 호소하여, 잇따라 폐지되어갔다.

그러나 폐지 후에도 노예밀무역은 계속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노예무역이 끝난 것은 1870년대가 되어서였다. 노예무역폐지 후, 노예를 대신하게 된 상품으로 유럽이 아프리카에서 찾은 것은 열대산물이었다. 즉, 서아프리카해안부의 야자유(뒤에는 팜핵도 포함)와 세네갈의 땅콩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산업혁명을 겪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비누·윤활유·양초의 원료가 되는 야자유, 마가린·사료의 원료인 팜핵, 식물성기름을 제공하는 땅콩의 수요가 컸다. 야자유 수출량은 1810년 불과 1000t이던 것이 42년 2만t, 55년 4만t으로, 땅콩은 40년대의 제로 단계에서 19세기 말에는 매년 평균 3만t으로 비약적으로 증대했다. 이들 합법무역의 생산물은 대부분이 아프리카인 소농에 의해 소규모로 재배된 것이었으며, 유럽인은 집하(集荷)된 산물을 해안부에서 거래한 데 지나지 않았다.

<전도(傳道)·탐험의 시대>

노예무역의 폐지와 함께 유럽 각국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미개인>으로 생각해왔던 아프리카인에게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전하고, 동시에 유럽문명을 전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대륙으로 들어갔다. 19세기 중엽 영국은 자유무역주의의 전성기였고 영토적 야심은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선교사들을 보호하지도 않았다.

선교사들은 포교와 함께 교육도 하였으며, 뒤의 식민지시대에는 아프리카인 초등교육은 대부분 이들 선교사들에 의해 담당되었다. 한편 그때까지 아프리카해안부는 유럽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나 내륙은 거의 <공백부(空白部)>로 남아 있었다. 이 미지의 공백부를 밝히기 위해, 영국에서는 1788년 아프리카내륙발견협회(뒤에 왕립지리학협회로 개칭)가 설립되어 협회가 재정적 원조를 베풀고 여러 탐험가를 내륙부에 들여보냈다.

먼저 19세기 중엽에 런던전도협회가 파견한 선교사 D.리빙스턴은 남아프리카에서 전도에 종사하였으며, 나아가서 내륙에 대한 포교를 목표로 중동부아프리카에 세 차례 탐험을 하여 지리상의 중요한 발견을 이룸과 동시에 내륙부에서 노예사냥의 비참함을 목격하고 그 폐지를 호소했다. 이어서 서아프리카에 있는 니제르강의 수원·수류·하구의 신비를 캐기 위해, 내륙발견협회는 M.파크·D.데넘·H.클래퍼턴·렌더 형제들을 파견하여 1830년에는 니제르강의 신비가 모두 밝혀지게 되었다.

셋째로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그 수원에 <달의 산>이 있다고 한 나일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왕립지리학협회는 19세기 중엽, R.F.버턴·J.H.스피크·J.A.그랜트·S.W.베이커 등을 파견했으며, 그 수원과 내륙부에 있는 앨버트호(湖)·빅토리아호·탕가니카호가 잇따라 밝혀졌다.

그리고 이 탐험기의 최후를 장식하여, 1870년대에는 H.M.스탠리가 콩고강의 수원으로부터 하구까지를 답사했다. 이 여행은 종래의 순수한 지리학적 관심에서 나온 탐험과, 그 뒤의 벨기에왕 레오폴드 2세에 의한 이 지역의 사유화를 계기로 유럽 각국의 영토적 야심이 노출된 <아프리카 분할>의 시발점이 되었다.

<식민지시대>

⑴ 아프리카 분할

1870년대의 제국주의기(帝國主義期)에 들어선 유럽 열강은 공업제품 시장과 원료 공급원을 찾아서 아프리카를 분할해갔다. 북아프리카에서는 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 후, 통일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프랑스의 적대감정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프랑스의 관심을 식민지 획득에 쏠리게 하였으며, 프랑스는 81년 튀니스를 병합했다.

이집트에서는 79년 부왕 이스마일이 영국·프랑스의 재정관을 해임시켰다는 이유로 양국 정부는 부왕을 퇴위시켜 괴뢰정권을 수립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라비 파샤의 반란이 일어나 영국과 프랑스는 공동으로 그 진압에 나섰으나, 프랑스의 국내위기 때문에 영국은 단독으로 82년에 이집트를 점령했다.

수에즈운하 개착에 다액을 투자하고 있었던 프랑스는 그 대상(代償)으로 서아프리카에 진출하게 되었다. 중앙·서아프리카에서는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콩고분지의 지배를 목표로 1876년 국제아프리카협회를 설립했는데, 이에 대해 프랑스는 탐험가 드 브라자를 파견하여 82년 콩고 하구 북쪽 지역을 획득했다.

한편 영국은 84년의 영국―포르투갈협정으로 포르투갈의 콩고 하구 영유를 인정하는 것과 교환조건으로 그곳에서의 자유로운 교역권을 얻었다. 독일은 83년 상인 A.뤼더리츠의 요청에 따라 남서아프리카(나미비아)의 영유를 주장하였으며, 서아프리카에서도 같은 해 토고란드와 카메룬을 획득했다.

이리하여 콩고분지의 지배를 결정하기 위한 베를린회의가 84년 11월에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포르투갈의 콩고분지 지배를 거부하고, 레오폴드 2세의 콩고자유국에 의한 지배와 그곳에서의 각국의 자유무역을 인정했다. 한편 프랑스는 니제르강 상류 지역으로부터 항구쪽으로 세력을 신장하려 했으나 도중에 만딩고제국을 재건하려는 사모리 투레의 저항을 받아 지연되었으며, 그 동안 영국은 상인 G.골디의 요청으로 해안부를 영유했다.

동아프리카해안부는 잔지바르의 술탄 지배하에 있었는데 독일식민협회의 C.피터스가 내륙 수장(首長)들과 맺은 협정을 방패로 하여, 독일은 84년 베를린회의에서 독일령 동아프리카(탕가니카)의 영유를 인정케했다. 한편 영국은 1879년 매키논의 영국 동아프리카회사가 얻은 특권을 방패로 하여 영국령동아프리카(케냐)의 영토권을 주장하여, 86년 영·독협정에 의해 동아프리카내륙부를 이분했다.

이어서 영국·독일의 관심은 나일강 수원에 쏠렸으며 양국의 각 특허회사는 부간다왕국에 사절을 파견했으나 독일이 한발 앞섰다. 그러나 90년 영·독협정으로 독일은 영국의 우간다 영유와 잔지바르의 보호령화를 인정했으며, 그대신 영국은 북해의 헬골란트섬을 독일에 할양했다. 이탈리아는 이미 에리트레아와 소말릴란드를 영유하고 있었는데, 88·89년 프랑스·영국과 각각 협정을 맺어 이 지역을 삼분할(三分割)했다.

동아프리카해안부 술탄의 주권을 인정한 영·불협정(1862)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영·독협정으로 잔지바르를 보호령화한 데 대해,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의 보호령화를 영국이 인정케 했다. 또한 프랑스는 영국의 로열니제르회사의 북방확대를 두려워하여, 90년 이 회사의 지배지역을 니제르강의 중류 세이에서 차드호를 잇는 선으로 정했으나 동서의 선은 확정되지 않았었다.

이집트를 지배하는 영국은 프랑스가 가봉에서 동진하여 나일강 상류에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96년 영국은 수단을 재정복하려고 H.H.키치너가 이끄는 이집트군을 파견하고, 98년 옴두르만 싸움에서 마흐디군을 무찌르고 하르툼에 들어갔다.

한편 프랑스는 J.B.마르샹 사령관의 군대가 동진하여 파쇼다로 진군하여 98년 양군은 파쇼다에서 대치했는데, 외교교섭 결과 프랑스가 철퇴했다(파쇼다 사건). 남아프리카에서는, 1889년 영국여왕으로부터 특허를 받은 C.J.로즈의 영국남아프리카회사가 북방 마타베렐란드와 마쇼날란드의 병합(로디지아)을 기도했으며, 동시에 바로첼란드(잠비아), 니아살랜드(말라위)도 병합했다.

그러나 마니칼란드(모잠비크의 일부)에서는 포르투갈과 대립하여, 90년 영국·포르투갈협정으로 국경이 확정되었다. 이어서 로즈는 보어인공화국(트란스발과 오렌지자유국)과의 병합을 기도하여, 95년 제임슨 침입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로즈의 정치생명은 끝났다.

그 뒤 영국의 남아프리카 정책은 J.체임벌린 식민장관과 J.밀너 남아프리카 고등판무관에 인계되었으며, 99년 그들은 마침내 보어인공화국과 개전(開戰)하였고 1902년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 보어전쟁의 종결로,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은 사실상 끝났다.

⑵ 초기 저항운동

분할과 그 뒤의 지배에 대해, 아프리카인이 결코 잠자코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분할기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 각지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집트 아라비 파샤의 반란(1881∼82), 수단의 마흐디 반란(1881∼98), 아비시니아 아드와의 싸움(1896), 소말리아 사이이드 무하마드의 반란(1891∼1920), 우간다 부뇨로의 반란(1891∼1920), 탕가니카 헤헤족의 반란(1891∼98)과 마지마지의 반란(1905∼1907), 니아살랜드 J.칠렘브웨의 반란(1915), 로디지아 마타벨레족과 마쇼나족의 반란(1968), 나탈 줄루족의 반란(1906), 남서아프리카 헤레로와 나마의 반란(1904∼1906), 골드코스트 아샨티의 반란(1900), 서수단 사모리 투레의 반란(1884∼98), 차드 라비흐의 반란(1897∼1900), 리비아 사누시의 반란(1912∼31) 등이다.

이들 초기저항의 특징은 첫째 종교가 투쟁을 조직하는 데 있어 중요 원리가 되었다는 사실, 둘째로 부족단위의 투쟁이 많았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결국 근대적 장비를 갖춘 식민지군의 힘 앞에 무릎을 꿇어갔다.

⑶ 각국의 식민지정책

초기저항을 무력으로 탄압한 유럽 각국은 뒤이어 제각기 다른 형태의 식민지통치에 들어갔다. 일반적으로 영국방식은 간접통치라 하여, 통치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백인 행정관의 수를 줄이고, 대신 아프리카인(人) 수장층을 행정 말단에 편입시켰다.

또 초기에는 백인만으로 구성되었던 총독 밑의 행정심의회, 입법심의회에 아프리카인 수장층을 배치시켜 아프리카인의 근대정치에 대한 적응훈련을 베풀었다. 이에 비해 프랑스방식은 동화정책(同化政策)이라 하여 프랑스문화를 식민지에 보급하고, 아프리카인을 개화시켜 동화흡수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프리카인 중에는 프랑스문화를 몸에 익힌 일부 엘리트(동화인)와 대다수의 비동화인이 있었으며 프랑스는 동화인에 대해서는 본국인과 대등하게 취급했다. 또, 벨기에방식은 온정주의(溫情主義, paternalism)라 하여, 아프리카인을 어린애로 다루었고 본국 식민성의 힘이 컸으며, 식민지 행정은 안정될 때까지 벨기에인이 전담했다. 그 대상으로 복리후생시설 등의 보호조치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아프리카인의 정치적 권리는 전혀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⑷ 모노컬처 경제의 형성

경제개발면에서는 처음에는 대부분의 식민지에서 본국의 위험부담을 피하기 위해 특허회사에 의한 개발이 실시되었다. 즉 민간기업에 특허를 주고, 특허회사는 아프리카인 수장으로부터 광산이권을 얻어 광산을 채굴하였다.

그러나 이권은 확대해석되어, 토지 수용·징세까지 실시했다. 또 이 시기에는 철도건설을 비롯하여 지역개발의 기반이 되는 시설이 정비되었으며, 그 완료와 함께 연선지역(沿線地域)이 백인 입식자를 위해 수용되었다. 입식자는 광대한 농장에서 아프리카인 노동력을 사용하여, 수출용 환금작물(커피·차·고무·담배 등)을 재배하였고, 수출이 특정 농산물에 치우치는 이른바 모노컬처 경제가 형성되어 갔다.

<아프리카의 민족운동>

⑴ 제1차·2차세계대전기간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민족운동의 <맹아기>라 불린다. 즉 분할 직후의 초기저항은 거의 모두 탄압되었으나, 아프리카인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저항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아프리카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초기의 저항조직, 전술면의 약점을 비판했지만, 그 정신면은 높이 평가하여, 이를 계승해갔다.

남아프리카연방에서는 1918년 도시의 아프리카인 인텔리층을 중심으로 아프리카인 민족회의가 결성되어 정부의 인종주의정책에 반대하였다. 케냐에서는 백인 입식자로 말미암아 토지에서 쫓겨난 키쿠유족의 해리 추쿠가, 21년 키쿠유청년동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운동은 아프리카인 처우개선을 위한 청원·진정 등의 합법적 수단을 취한 온건한 것이었으며, 독립은 아직 목표로서 내세워지고 있지 않았다.

⑵ 제2차세계대전 이후

앞의 <맹아기>에 대해 이 시기의 운동은 <개화기(開花期)>라 할 수 있다. 20세기 초에 서인도제도에서 일어났던 범아프리카주의 운동은 식민지로부터의 해방·독립을 희구하는 일대조류가 되었다. 이 운동은 또 제2차세계대전 후의 아시아 제국의 독립과, 그 결과 열린 반둥회의(1955)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사실과, 제2차세계대전에 연합군 측에서 참전하여 아프리카 이외의 세계를 경험했던 수많은 아프리카인이 귀국한 사실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즉, 영국 식민지 골드코스트에서는 1948년 코코아의 독점적 매상에 대해 아프리카인의 폭동이 일어났으며 영국정부는 그 원인조사를 위한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아프리카인에 대폭적인 자치를 허용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에 협조적이었던 골드코스트회의당(당수 당카)을 비판하면서 K.은크루마는 탈당하여 회의인민당(會議人民黨)을 결성하고, 즉시 독립을 요구하는 국민에게 총파업을 호소했기 때문에, 체포·투옥되었다.

그 동안, 51년의 신헌법에 따라 입법심의회선거를 실시한 결과, 회의인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은크루마는 석방되었다. 그리고 56년 선거에서 다시 다수파를 차지한 회의인민당이 내각을 조직하여 57년 3월 검은 아프리카 최초의 독립국으로 가나가 탄생했다. 프랑스 식민지에서는 다른 길을 걸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 열린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모든 아프리카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신헌법 제안이 있었으나, 당시 프랑스정부는 조국 부흥과 인도차이나 문제에 몰두하여 아프리카에는 관심을 돌릴 수 없었다. 1946년 아프리카인은 바마코회의를 열어, 세네갈을 제외한 7개 식민지가 참가하고, 우페 부아니를 중심으로 아프리카민주연합(RDA)을 결성하고 프랑스공산당과 연합했다.

프랑스정부는 RDA를 위험시하여 50년에 RDA 집회를 금지했다. 56년 <기본법>이 제정되어 아프리카인에게 대폭적 자치가 부여되었으나, 독립에 관해서는 독립 후 프랑스와의 관계가 중요 의제가 되었다. 58년 드골의 제5공화국 수립과 함께 본국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프랑스공동체 구상이 나와, 기니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는 공동체에 가입했다.

기니의 세쿠 투레는 <예속 속의 부유보다는 자유 속의 빈곤을 택하겠다>하여 가입을 거부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원조는 즉시 중단되었다. 이리하여 기니를 제외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는 60년에 프랑스공동체 틀 안에서 독립을 달성했다.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민족운동이 억제되어 왔으나, 영국·프랑스 식민지의 독립을 향한 움직임에 자극되어 급속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959년 바콩고족 아바코당(당수 J.카사부부)에 대한 집회금지가 발단이 된 수도 레오폴드빌에서 폭동·학살이 일어나, 이를 계기로 독립의 요구가 높아졌다. 60년 초 브뤼셀원탁회의가 열려 독립시기에 관한 협의가 있었으나, 즉시 독립을 주장했던 아프리카인 대표의 목소리에 벨기에 정부는 사태를 포기하는 형태로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그해 6월 카사부부대통령, 루뭄바총리 아래 독립이 달성되었다.

<아프리카 제국의 독립>

이상에서 보아 왔듯이 식민지의 통치방식 차이에 따라, 독립과정도 상당히 달랐으나, 어느 경우에도 독립운동은 결코 평탄한 것은 아니어서 요구·폭동·탄압·투옥·대립·항쟁 등의 과정을 겪었다. 먼저 1956년에는 수단, 튀니지, 모로코가 독립했으며, 57년에는 검은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골드코스트가 독립하여 가나가 되었다.

계속해서 58년 기니가 독립했고, 60년에는 1월에 카메룬, 4월에 토고, 6월에 콩고(레오폴드빌, 현 자이르)·세네갈·말리·마다가스카르, 7월에 소말리아, 8월에 코트디부아르·다호메(현 베냉)·오트볼타(현 부르키나파소)·니제르·중앙아프리카·콩고(브라자빌)·가봉·차드, 10월에 나이지리아, 11월에 모리타니 등 합계 17개국이 차례로 독립하여 이른바 <아프리카 독립의 해>가 되었다.

이어서 61년에는 시에라리온·탕가니카(현 탄자니아), 62년에는 르완다·부룬디·알제리·우간다, 63년에는 케냐, 64년에는 니아살랜드(현 말라위)·북로디지아(현 잠비아)가 속속 독립을 이룩하고, 남아프리카와 약간의 나라를 남기고 아프리카 대륙의 거의 모든 나라가 독립했다. 이상을 대충 추려 말하면, 다음의 몇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영국 식민지의 경우, 비교적 초기부터 아프리카인을 정치에 참획시킴으로써, 독립 후의 정치운영이 벨기에령에 비해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프랑스 식민지의 경우는 <동화정책>으로 프랑스와의 일체화가 이루어졌으며, 독립 후에도 영국 식민지에 비해 본국과의 유대가 보다 강했다(다만 기니는 분명히 그것을 거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광물자원이 풍부한 나라(자이르)나, 유럽인의 입식지(케냐) 같은 곳에서는 유럽인의 이권이 개입되어 있어서 다른 데에 비해 독립이 난항이었다. 특히 가장 비참했던 것은 아프리카인의 근대정치참가를 허용하지 않고 그들의 독립요구에 대해 책임을 포기하는 형태로 사태를 내던진 벨기에령 콩고였다.

즉, 세계 유수의 구리·코발트 등의 광산자원을 가진 콩고에서 외국기업이 끝까지 이권을 유지하려고 획책한 사실이 독립 후의 이 나라를 정치적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1960년 6월 독립 5일 후에 벨기에 사령관에 대해 군대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다시 7월에는 구리산출지인 카탕가주(현 샤바주)의 M.촘베가 이 주의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루뭄바 총리가 국제연합군의 출동을 요청하면서 콩고문제는 국제화되기까지 하였다. 한편, 금·바나듐·다이아몬드·백금·크롬·망간·우라늄·구리 등 풍부한 광산자원이 매장되어 있던 남아프리카는 백인의 이권 때문에 독립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평화적인 교섭을 통해 말라위·잠비아(1964), 66년에 레소토·보츠와나, 68년에 스와질란드 등이 독립하였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식민지해방선언이 나오게 되자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와 앙골라가 장기간에 걸친 치열한 무력투쟁 끝에 독립을 맞았다. 이들 나라가 종주국 대(對) 아프리카인해방세력이라는 이극구조(二極構造)였는데 대해, 종주국 영국대 백인입식자 대 아프리카인해방세력의 삼극구조를 가진 짐바브웨와 국제연합 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 아프리카인해방세력의 대립을 보인 나미비아 등은 무력투쟁 과정에서 동서세력 및 주변 아프리카제국까지 개입하여 독립은 한층 복잡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 짐바브웨가 총선거 실시로 실질적인 독립을 하게 되고, 90년 아프리카 최후의 식민지였던 나미비아가 남아프리카공화국 통치에서 벗어남으로써 아프리카 제국은 모두 독립하게 되었다.

<독립 후의 여러 문제와 최근의 현안문제>

독립후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직면한 과제는, 정치면으로는 국가건설의 방향을 잡는 것과 경제면으로는 모노컬처 경제구조를 불식하는 일이었다. 먼저 정치면에서 대부분의 나라들이 채택한 방향은 사회주의노선이었다.

첫째는 아프리카사회주의라는 것인데, 1967년 아루샤선언에 따른 탄자니아의 우자마 사회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골자는 식민지화 이전의 아프리카사회가 가지고 있던 공동체원리를 살려 농민과 노동자만으로 이루어진 착취없는 평등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이 원리에 따라 종래 백인이 장악하고 있었던 은행, 보험회사, 외국무역기업 등의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거나 정부가 과반수의 주식을 취득함으로써 경영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편, 국민의 90% 이상이 종사하는 농사에 대해서는 종래의 소농형태에서 공동농장, 공동작업, 노동에 따른 생산물의 배분이라는 집단화가 실시되었다.

둘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른 과학적 사회주의의 채택이다. 모잠비크나 앙골라에서는 모든 기간산업이 국유화되어 인민의 소유가 되었다. 또 전위당(前衛黨)으로서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경제를 계획했으며, 노동조합을 통한 인민의 경영참가를 추진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러시아·동유럽·중국 등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경제면에서는 식민지적 경제구조를 타파함으로써, 경제의 자립화를 성취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 수단으로서 첫째로 취해진 것이 백인 입식지에서는 입식지의 아프리카인에 대한 반환이며, 1962년의 케냐의 <100만 acre 입식계획>이 그 예이다. 입식지를 세분화하여, 아프리카인에 재입식(再入植)시켜, 아프리카인 중농(中農)을 육성함과 동시에 도시에 체류하고 있는 실업자에게 토지를 재분배했다. 또 입식지 이외에 관개시설 건설과 비료의 도입 등, 제도·기술면의 개혁이 이루어져 이를 금융면에서 원조하기 위한 토지은행이나 공사 등이 설립되었다.

둘째로 식민지시기에 백인·인도인이 차지하고 있던 부문의 아프리카인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숙련자나 기술자가 적어 지금까지 운영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이상을 포함하여, 경제 전체를 다각화하고 균형이 잡힌 경제구조를 창출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나라는 경제개발계획을 작성하고, 그 목표에 따라 경제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각국이 공통적으로 부딪히는 난관은 계획 실현을 위한 자금의 부족으로 그 재원을 외국으로부터의 원조(차관과 공여)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압도적으로 1차산물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는 국제경제 변동의 영향을 받기 쉬우며, 1973년의 석유위기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대폭적으로 수정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교역조건의 악화와 채무의 누적에 의한 경제적 위기는 국민의 불만을 증대시켰으며 그 불만을 미리 터뜨린 군부에 의해 정권전복을 기도하는 쿠데타가 독립 후의 아프리카 제국에서 빈발하였다. 1965년의 알제리, 66년의 가나(은크루마의 실각)·나이지리아·부룬디·오트볼타·중앙아프리카, 67년의 다호메·토고·시에라리온, 68년의 말리·콩고, 69년의 리비아·니제르·소말리아·수단, 71년의 우간다, 72년의 다호메·가나·마다가스카르, 73년의 르완다, 74년의 니제르·에티오피아, 75년의 나이지리아·차드 등에서의 쿠데타가 그 예이다.

군사정권 가운데에는 <과도적> 사명을 마치고 문민정권(文民政權)으로 이행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반대로 군사정권이 장기화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편 짐바브웨의 독립과정을 보면, 76년의 제네바회담이 실패한 뒤 영국이 미국과 협력하며 새로운 제안을 준비하고 있는 사이에 입식자정부는 국내 온건파 아프리카인과 <국내해결>을 꾀하여 79년 6월 <짐바브웨·로디지아> 괴뢰정권이 성립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프리카인 해방세력과 영국·미국이 반대하고 주변 각국이 영국을 움직여 같은 해 가을부터 제헌회의가 열렸고, 모든 당사자가 참석하여 토의한 결과, 화해가 성립되어 1980년 4월에 독립이 실현되었다.

아프리카 최후의 식민지라고 불린 나미비아는 오랫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불법통치하에 시달려 왔는데 1988년 12월에 앙골라·쿠바·남아프리카공화국 간에 브라자빌합의가 이루어졌고, 앙골라주둔 쿠바군의 철수문제 등이 해결되었으므로 1989년 4월부터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435호에 바탕을 둔 독립절차가 개시되었고, 1990년 3월 마침내 독립함으로써 아프리카 제국은 모두 독립을 달성하였다.

최근의 아프리카 전반(全般)의 동향을 보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탈(脫)아파르트헤이트화와 더불어 민주화·자유화의 조류가 강해지고 있다. 격변하였던 러시아·동유럽 정세의 영향도 있지만 이제까지 쌓인 강권체체의 모순이 분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제의 안정이 긴급한 과제이며, 아프리카경제공동체의 단계적 창설도 일정에 올랐는데, 일국경제와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가 관건이다. 남아프리카의 변동은 더욱 급격하여 91년 6월에는 마침내 아파르트헤이트의 철폐가 실현되었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아프리카' 항목에서

출처 : [기타]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201&no=812&page=1&sm=&key=?????&mod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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